(6월 23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라 = 출 2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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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월) | 출 2장 1~6절 |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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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의 ‘때’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 가운데 그 약속이 역사 가운데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손과 관련하여 언약을 합니다. 자손이 이방에 객이 되어 사백 년 동안 섬기고, 괴롭힘을 당할 것과 그 자손이 큰 제물을 이끌고 나올 것을 언약합니다.(창 15:13~14) 이 말씀대로 아브람의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애굽의 ‘제18왕조’의 초대 왕인 ‘아모스’를 이어 투트모스 1세가 3번째로 ‘제18왕조’의 왕으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애굽의 ‘제18왕조’는 중요한 한 가지 결단을 내립니다. 셈족의 혈통인 ‘히브리 민족’을 ‘정치적으로’, ‘제도적으로’, 완전히 ‘노예’를 만듭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이 가해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대해 말하기를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출 1:12)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하셨던 ‘그때’가 이르렀다는 신호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실현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그때를 바라보며 우리는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한 가정이 여기에 대해 답을 주고 있습니다.
(1~2) 주변과 환경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일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먼저 생각하는 선취적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투트모스 1세는 ‘강제노역’과 같은 강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들의 수가 늘어나자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남아면 태어남과 동시에 즉시 죽이고 여아면 살려두도록 왕명을 내립니다. 남자아이의 출산 금지를 통해 히브리인들의 혈통을 혼혈족으로 만들어 단일 민족으로서 자신의 왕국에 대한 대항 세력이 되지 못하도록 정책을 펼칩니다. 이때 히브리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며 살아가던 경건한 레위인의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의 이름은 ‘아므람’이었고, 아내의 이름은 ‘요게벳’이었습니다.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왕의 명령에 의하면 이 아이의 생명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어야만 했습니다. 이 아이에 대해 성경은 이런 말을 합니다.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요게벳은 자신이 출산한 아이를 보는 순간 그가 장차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존귀한 자’임을 깨닫습니다. 신생아를 숨긴 ‘석 달’은 아이의 울음소리로 인해 모든 정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시기였습니다. 요게벳은 이런 주변과 환경을 먼저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먼저 생각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주변과 환경을 우선에 두게 되면 핑계와 변명이 먼저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주변과 환경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요게벳처럼 하나님 나라 일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먼저 생각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는 믿음이 생각에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행동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아이가 점점 자랍니다. 사내아이의 우렁찬 목소리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됩니다. “석 달을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요게벳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세 가지의 중요한 결단을 내립니다. 첫 번째는 아이를 넣을 ‘갈대 상자’를 만듭니다.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바릅니다. 두 번째는 ‘갈대 상자’ 안에 아이를 넣습니다. 세 번째는 ‘갈대 상자’를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둡니다. 요게벳의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함께 이 아이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해주실 것이란 믿음의 확신이 생각에 머물지 않고 실천하는 모습 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은 레위인 가운데서도 아주 경건한 자들이었습니다. 요게벳은 남아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대로 언약 백성임을 명시시키기 위해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이 아이는 히브리인이라는 확증을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아이를 누가 건져서 키운단 말입니까! 현실적으로 이 아이를 건져 키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요게벳의 행동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의 행동은 ‘혹시나!’하는 ‘요행’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는 믿음이 생각에 머무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행동하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때를 바라보는 신앙을 몸소 실천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요게벳처럼 신앙의 산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움직이는 살아있는 ‘산 도구’가 되지 못하고 생각만 하는 신앙은 역동성이 없습니다.
(4~6)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때를 믿음으로 기다리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3개월 된 남아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었을 때 나일 강에는 애굽 왕 투트모스 1세의 외동딸인 핫셉수트 공주가 종교적 의식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핫셉수트 공주와 남편인 투트모스 2세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으며, 투트모스 2세는 첩을 통해 아들을 가지게 됩니다. 핫셉수트 공주는 나일강의 신의 능력을 받아 아이 가지길 원합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가졌던 공주의 귀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그의 두 눈에 갈대 상자가 들어옵니다. 공주는 시녀를 불러 ‘갈대 사이’에 있는 상자를 가져오도록 명합니다. 뚜껑을 열고 그 속을 봅니다.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순간 공주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신이 나에게 주신 아이다!’
하나님께서는 핫셉수트 공주의 마음에 모성애를 작동시킵니다. 아이에게 한없는 ‘연민의 정’과 ‘동정심’을 가지도록 만듭니다. 공주는 자신의 아버지가 내린 ‘왕명’보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위로를 먼저 느끼게 됩니다. “불쌍히 여겨 이르되”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여러분들의 대적까지 이용하여 그때를 이루어 갑니다. 때로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마음과 환경을 만지셔서 돕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때에 쓰임 받는 일꾼으로 양육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때를 믿음으로 기다리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적용)
하나님의 약속의 때는 우리의 의지로 만들어지는 때가 아닙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과 그때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때를 기다리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믿음으로 행동하도록 신호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는 거침없는 행동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환경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마음까지 움직여 그때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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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사람님의 댓글

투트모스1세는 히브리인들의 혈통을 혼합족으로 만들기 위하여
남아는 죽이도록 명령하였을때
요게벳은 자신의 아이를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띄웁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때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요게벳의 신앙을 보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의 자녀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나의 의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 때를 바라보는 신앙이 되어야겠습니다
때로는 나의 마음에 무언가 와 닿을때가 있고
주의 일을 감당하고픈 마음이 생길때
머뭇거리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내일로 미루지 말고
즉각적인 순종의 자세로 나아가는 모습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알 수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그 마음을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믿음의 발걸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coco님의 댓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지금 여기서 나의 믿음을 세워갑니다
언젠가 큰 믿음이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행동하는 신앙으로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약속의 때를 기다립니다